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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04

은행건축의 새로운 유형을 제시한 한국외환은행 본점

정림건축의 기본을 되새기다 - 2

1970년대 당시, 무거워 보이는 기둥과 좁고 높은 출입구 등을 통해 견고함과 중후함을 강조하던 은행건축은 한국외환은행 본점을 계기로 새로운 인식의 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한국외환은행 본점 설계팀은 사람들이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누구나 맘 편히 찾아오는 ‘백화점 같은 은행’을 설계한다는 목표로 연구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특히 한국외환은행만의 고유성, 공공성과 조형성, 환경과 에너지 부문 연구에 집중했다. 그 결과 타워부와 포디움으로 구성된 새로운 유형의 은행건축이 탄생되었다. 이를 바탕으로 이후 작업한 대구은행 본점은 보다 더 완성된 모습을 선보이며 향후 20년 동안 국내 은행건축의 모범 사례로 꼽혔다. 44년 전에 기록된 한국외환은행 본점 설계 보고서와 37년 전에 작성된 대구은행 본점 설계 보고서를 통해 은행건축의 모범 사례로 꼽히는 두 은행의 가치는 무엇인지 물음에 대한 단서를 찾아보자.

 

1973년의 기록: 한국외환은행 본점 설계 설명서

《한국외환은행 본점 설계 설명서》는 1973년 6월에 작성되었다. 설계 보고서에는 당시 적합한 은행건축의 유형과 기능, 조형 등 은행의 디자인에 관한 이야기와 함께 대규모 건축물 설계에 대한 설계팀의 고민의 흔적이 담겨 있다. 선례가 없는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해 실행했던 수많은 연구, 도시 맥락에 순응할 수 있는 건축물로서 디자인 방향 설정 등 설계팀의 노고를 엿볼 수 있다.

 

 

대지의 제약 조건과 공공성을 고려한 배치 계획

외환은행본점은 안으로는 은행 고유의 기능을 만족시키고, 밖으로는 도시의 주요 시각적 요소로서 도시경관에 기여함으로써 인근 환경을 개선하고 은행의 미래상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본점, 영업장 및 외부광장은 다음의 다섯 가지 배치 계획에 따랐다.

 

첫째, 전면과 측면에 본점과 영업장을 대등하게 배치할 것.
둘째, 전면과 측면에서 본점과 영업장의 진입이 순조로울 것.
셋째, 인접한 대지의 고층건물로부터 초고층부가 보호되도록 할 것.
넷째, 랜드마크가 될 수 있는 조형성
다섯째, 외부공간의 질 확보와 유지관리의 용이함.

 

이러한 기준을 바탕으로 대지가 가진 제약 조건을 해결하고, 공공성을 고려한 배치 대안이 제시되었다. 영업장이 있는 저층부 매스는 을지로와 명동의 주 보행로 쪽으로 근접시키고 본점의 업무시설이 있는 고층부 매스는 대지 남쪽으로 후퇴시켜 영업장에 주는 위압감을 덜어 본점 고층부 진입 시 영업장 고객의 보행 동선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계획했다. 본점 전면광장이 북쪽에 자리하게 되어 그늘이 생긴다는 단점이 있지만 이는 영업장을 명동 보행로 쪽으로 근접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반면 이 광장은 교통광장으로 사용되므로 채광 문제는 큰 단점이 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결과적으로 은행 직원들이 이용하는 통근 버스, 고객의 지상 주차장 확보를 고려한다면 널찍한 본점 전면광장은 지상 주차를 가능하게 하면서도 건물의 경관을 헤치지 않는다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조망과 경관을 고려하다

고층 건물은 고층부에서 도시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장점과 더불어 그 높이만큼 상대적으로 도시경관 자체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1970년대 서울은 이제 막 고층건물이 들어서기 시작하는 무렵이므로 그 출발점에 서 있던 외환은행 본점은 고층 부분에서 조망되는 서울의 주요 시각요소를 충분히 고려하였다. 또한 고층 부분이 시각적으로 드러나는 시점을 분석하여 형태와 외벽, 방향성을 결정하고자 하였다. 건축물 내부에서 조망이 가능한 북악산과 남산, 인왕산과 낙산, 그리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고궁들은 서울 도시경관의 가장 귀중한 자산이다. 대지 위치를 고려하면 주요 시각요소는 주로 대지의 남쪽과 북쪽에 집중되어 있으며, 서쪽으로는 덕수궁이 있으나 시청광장 주위의 고층화(36층 롯데호텔과 백남빌딩 건설 예정)에 의해 시야가 차단된다. 고층부의 사무공간에서 이들 경관을 조망하려면 기준 평면은 동서방향으로 긴 평면이 합리적이다. 기능적으로는 서쪽 벽면을 최소화하여 여름철 냉방부하를 절감하는 효과가 있고, 고층부 기준 평면을 방재 및 피난에 유리한 양측 코어 형식으로 구성할 수 있는 가능성도 내포한다.
 

한국외환은행 본점이 도시경관으로 인식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건물 높이의 3배인 390미터 거리에서는 본 건물이 인접건물과의 관계가 보이고, 600미터 거리에서는 건물의 스카이라인, 1,200미터 거리에서 건물군으로 보이다가 1,200미터 이상에서는 도시경관으로 인식된다. 또한 1,600미터 이상에서는 소위 도시 인간적 척도(Urban Human Scale)를 벗어나 건물의 인상은 약해지고, 그 조형에 따라 겨우 건물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또 건물 높이와 같은 130미터의 거리[Intimate Outdoor Human Scale]에서는 건물을 가깝게 느끼며 건물 부분을 상세히 볼 수 있고, 높이의 2배인 260미터의 거리[Easy Outdoor Human Scale]에서는 건물 전체를 볼 수 있다. 따라서 외환은행 본점은 도시민에게 좋은 시각효과를 주기 위해 근거리(주변의 건물 및 도로), 중거리(고층건물과 고가도로) 및 원거리(1,200미터에서 1,600미터) 시점에서의 조형성을 고려하여 계획을 세웠으며, 도시의 주요한 랜드마크가 되기 위해 원거리에서도 그 존재를 인식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이외에도 전면도로나 고가도로 위를 고속으로 움직이는 운전자나 자동차 승객의 시점, 주변 골목에서의 보행자 시점, 그리고 주변 고층건물과 도시 고지대에서 보는 정지 상태의 조감 시점까지 감안한 것이다.

 

 

은행건축의 초석, 한국외환은행 본점

“외환은행의 이미지가 형태적으로도 부각되기 위해서는 외환은행 고유의 은행 공간, 특히 타 지점에서도 하나의 통합된 이미지를 구축해야 하는 영업장의 공간계획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당시 외환은행 본점에서는 은행의 미래상이 백화점 은행(Department Store Bank)이라는 말로 규정될 수 있는 점에 착안하여, 영업장 공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경비 보안시설의 적극적인 활용을 통해 공간적으로는 보다 개방적이고 친밀한 느낌을 주도록 계획하였다. 기계화로 업무의 신속한 처리가 가능하고, 넓은 유리창을 통해 투시되는 매력적인 영업 공간, Picture wall과 조경에 의해 아름답고 부드러우면서도 동시에 편안하고 품위 있는 실내 분위기를 형성하여 고객이 압도되지 않고 자신의 거실처럼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폐쇄적인 셔터와 높은 계단, 외부 식수대 등은 영업장의 강력한 흡수력을 약화시키는 것이므로 배제하였다. 여기에 외환은행의 심볼과 색상 또한 주요한 의장요소로 고려하였으며, 고객의 성향을 분석하여 이를 존중하도록 하였다. 특히, 영업장은 고층부와 기본 형태를 일치시켜 조화로움과 동시에 구조체의 표현이나 재료의 대조를 추구하였다. 고층부는 커튼월에 의해 구조체를 감싸는 유연한 방식을 사용하여 자칫 강하게 보일 수 있는 매스를 부드럽게 계획하는 대신, 영업장은 검정 대리석으로 구조체를 강렬히 표현하여 고층부에 압도되지 않도록 하였다.”

 

 

 

 

앞서 기술된 내용은 외환은행 본점 설계설명서에서 발췌하여 정리한 것이다. 내용에서 알 수 있듯이 외환은행 본점은 사용자를 배려하고 도시 공간을 고려한 계획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정림건축은 이러한 고민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대구은행 본점을 비롯한 다수의 은행건축 설계를 진행했다. 한국외환은행 본점은 정림건축이 ‘기본’을 다지는 초석 중 하나인 것이다.

 

 

“정림건축의 기본을 되새기다”, 《Junglim Architecture Works 2013》 발췌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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